전용서체 연대기 · 1편
기업 전용서체의 시작: 현대카드 유앤아이와 아모레퍼시픽 아리따(2003~2006)
현대카드는 2003년 신용카드 플레이트 비율을 글자에 담은 유앤아이를 내놓았고, 아모레퍼시픽은 2005년부터 만든 아리따 돋움을 2006년 한글날을 앞두고 무료로 풀었습니다. 두 글꼴이 왜 만들어졌고 무엇이 새로웠는지, 이후 20년에 무엇을 남겼는지 정리했습니다.
한국 기업 전용서체의 역사는 2003년 현대카드 '유앤아이(Youandi)'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현대카드는 이를 "국내 최초의 기업 전용 서체"라고 부르고, 언론도 대체로 그렇게 적습니다. 3년 뒤인 2006년 아모레퍼시픽은 '아리따 돋움'을 기업 사이트에서 누구나 내려받게 했습니다. 하나는 글자만 보고도 회사를 알아보게 하는 '식별'의 길을, 다른 하나는 글꼴을 사회에 내놓는 '나눔'의 길을 열었고, 이 두 갈래가 이후 20년 기업 서체의 흐름을 갈랐습니다.
현대카드는 왜 2003년에 전용서체를 만들었나?
현대카드는 신용카드업계의 후발주자였습니다. 업계에 늦게 들어온 회사가 자기 개성과 품격을 고객에게 각인시키려면 로고 하나로는 부족했고, 그 답으로 고른 것이 글꼴이었습니다. 신용카드업을 상징하는 카드 플레이트 모양을 모티프로 삼아 서체를 만들고, 이를 CI와 광고 전반에 일관되게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기업명을 드러내지 않아도 서체만으로 현대카드임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 회사의 설명입니다. (한경 매거진, 2024-08-28)
2000년대 초만 해도 서체로 브랜드 정체성을 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같은 기사는 지금은 기업 고유 서체가 브랜드 정체성이 됐지만, 그 흐름을 연 곳이 현대카드라고 설명합니다. 이름 '유앤아이'에는 고객(YOU)과 현대카드(I)를 잇는 소통 도구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메트로신문, 2015-10-11)
연도는 출처에 따라 갈립니다. 현대카드가 2024년에 펴낸 아카이빙북과 이를 다룬 기사들은 2003년을 쓰지만, 2014년 데일리안 기사는 "지난 2004년 카드업계 최초로 전용서체 유앤아이체를 도입했다"고 적었고, 2015년 메트로신문도 2004년 개발로 썼습니다. 이 글은 현대카드가 공식 기록으로 삼은 2003년을 따릅니다.
유앤아이는 무엇이 새로웠나?
첫째, 글자의 비례를 제품에서 가져왔습니다. 유앤아이는 신용카드의 물리적 형태와 각도, 비율(1.6:1)을 글자에 반영했습니다. (메트로신문, 2015-10-11) 월간 디자인은 이 카드 플레이트 비율을 1:1.58로 적었고, 2024년 아카이빙북의 판형과 그리드, 이미지 비례에도 같은 비율이 적용됐습니다. (월간 디자인, 2024)
둘째, 한 번 만들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유앤아이는 주로 제목에 쓰였고, 최초 개발 후 8년간 보완 작업을 거쳐 2012년에야 제목뿐 아니라 일반 본문에서도 편하게 쓰고 읽을 수 있게 완성됐습니다. (메트로신문, 2015-10-11) 이것이 영문과 한글 모두에 본문용 서체를 더한 '유앤아이모던'입니다. 한경 매거진은 유앤아이모던을 2012년으로, 디자인컴퍼스는 2013년으로 적습니다.
셋째, 가변서체로 갔습니다. 2021년 '유앤아이뉴'는 디지털 환경에서 다양하게 쓰이도록 국내 기업 최초로 가변 서체로 개발됐습니다. (한경 매거진, 2024-08-28) 영문 서체는 리뉴얼을 거쳐 기존 5종에서 22종으로 늘었고, 한글은 윤디자인과 함께 세밀하게 다듬었습니다. (디자인컴퍼스, 2024-08-27) 영문 자족 수는 2021년 출시 당시 기사가 23종으로 적어 매체에 따라 갈립니다. (디아이투데이, 2021-12-15)
서체가 브랜드를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은 뜻밖의 자리에서 증명됐습니다. 현대카드가 2022년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에 유앤아이의 외부 사용을 허락했을 때, 현대카드는 작중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많은 시청자가 서체를 알아챘다고 합니다. (주간경향, 2024-08-28)
유앤아이는 누가 디자인했나?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한 한경 매거진, 주간경향, 디자인컴퍼스, 월간 디자인 네 매체의 기사 어디에도 2003년 첫 유앤아이를 그린 디자이너나 외부 개발사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뒤 단계뿐입니다. 2021년 영문 리뉴얼은 현대카드 디자인 랩이 맡았고, 한글 다듬기는 윤디자인과 협업했습니다. (디자인컴퍼스, 2024-08-27)
현대카드는 2024년 8월 20일 유앤아이 20여 년의 여정을 기록한 아카이빙북 「아워 타입페이스(Our Typeface)」를 펴냈습니다. 디자인 뮤지엄 관장 데얀 수직이 서문을 썼고, 1986년 '안상수체'를 발표한 안상수가 인터뷰에 참여했습니다. (한경 매거진, 2024-08-28) 책은 세 버전의 개발 과정을 분석한 'Three Eras', 전문가 11명과 개발 참여 구성원의 글을 모은 'Thoughts', 적용 사례를 모은 'Expressions'로 구성됐고, 정태영 부회장이 총괄 디렉터를 맡아 안그라픽스가 발행했습니다. (월간 디자인, 2024) 첫 유앤아이의 디자이너가 궁금하다면 이 책의 'Three Eras'가 가장 가까운 기록일 것입니다.
아모레퍼시픽 아리따는 왜 '나눔'을 택했나?
아모레퍼시픽은 2005년 아리따 글꼴 개발을 시작해, 2006년 9월 27일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 전용 글꼴 '아리따'를 발표했습니다. 그해는 훈민정음 창제 560돌이자 한글날이 국경일로 다시 지정된 뒤 처음 맞는 한글날이었습니다. 회사는 이 글꼴을 기업 사이트를 통해 일반인도 함께 쓰도록 무료로 나눠 주면서, 이를 새로운 형태의 "한글 문화 나눔 활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투데이, 2006-09-27)
개발 취지는 두 겹이었습니다. 기업과 도시의 개성이 강조되는 흐름 속에서 '타이포그래픽 아이덴티티 전략'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이 하나이고, 기업 정체성을 알리는 역할과 함께 대중에게 널리 보급해 나눔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이투데이, 2006-09-27; 아모레퍼시픽그룹 뉴스, 2015-01-20) 제품, 광고물, 사내 보고서, 사인류 등 회사 전반의 글자 체계에 적용하면서 동시에 고객 접점의 체험 마케팅 도구로도 쓴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현대카드가 글꼴을 '우리만의 것'으로 쥐었다면, 아모레퍼시픽은 글꼴을 풀어 놓는 쪽이 오히려 브랜드에 이롭다고 본 셈입니다.
아리따는 누가 만들었고 어떻게 커졌나?
아리따 돋움은 홍익대 메타디자인연구소 안상수 교수가 총괄하고, 서울여대 한재준 교수, 글꼴 디자이너 이용제, 디자인 전문기업 안그라픽스가 협업해 만들었습니다. PC용 트루타입(TTF) 글꼴로 한글 완성자 2,350자와 조합자 11,172자, 영문·숫자 94자 등을 갖췄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철학에 근거하되, 아름다움과 건강을 추구하는 회사 성격에 맞춰 손글씨의 맛을 살리고 간결함을 지향했다는 것이 당시 설명입니다. (이투데이, 2006-09-27) 아모레퍼시픽은 딱딱하고 직선적인 기존 돋움체와 달리 부드러운 곡선을 살린 새로운 표정을 제시한 본문용 글꼴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모레퍼시픽그룹 아리따 소개 페이지)
배포는 굵기별로 이어졌습니다. 2006년 본문용 아리따 돋움M과 강조·소제목용 돋움SB, 2007년 안내서용 돋움L과 큰 제목용 돋움B, 2012년 영문 '아리따 산스'가 나왔습니다. 2012년부터 2년에 걸쳐 만든 본문용 '아리따 부리' 5종(Hairline·Light·Medium·Semi-bold·Bold)은 2015년 1월 20일 공개됐는데, 이때는 안상수와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 글꼴 디자이너 류양희가 협업했습니다. Hairline은 국내 최초로 머리카락처럼 가는 획 굵기로 설계됐습니다. (아모레퍼시픽그룹 뉴스, 2015-01-20) 이름 '아리따'는 「시경」 관저 편의 "아리따운 아가씨"에서 따왔습니다. 2016년 6월에는 국내 최초의 중문 기업 서체 '아리따 흑체'가 본문용 굵기로 먼저 나와 2017년 3종으로 완성됐고, 아리따는 2015년 7월 레드닷, 2016년 1월 iF 디자인 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부문 본상을 받았습니다. (아모레퍼시픽그룹 아리따 소개 페이지)
두 글꼴이 이후에 남긴 것
유앤아이와 아리따는 기업 서체의 두 가지 쓰임을 처음 보여 줬습니다. 유앤아이는 글꼴이 로고 없이도 브랜드를 식별시킬 수 있음을, 아리따는 글꼴을 공개해도 브랜드 자산이 줄지 않고 오히려 문화 활동으로 평가받을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주간경향은 유앤아이가 네이버 나눔서체, 배달의민족 한나체, 아모레퍼시픽 아리따체 등 기업 서체 개발 붐의 시초로 평가받는다고 전합니다. (주간경향, 2024-08-28) 2015년 한글날을 앞두고 메트로신문은 기업들이 자체 개발한 한글 서체를 일반에 무료로 배포해 한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기업 이미지를 드러내는 마케팅 수단으로 쓴다고 정리했는데, 이 두 문장은 각각 아리따와 유앤아이가 먼저 걸어간 길입니다. (메트로신문, 2015-10-11)
두 글꼴은 '꾸준함'이라는 공통점도 남겼습니다. 유앤아이는 세 번의 개편을 거치며 20년 넘게 같은 이름을 지켰고, 아리따는 돋움에서 부리, 산스, 흑체로 한 가족을 10년 넘게 키웠습니다. 전용서체를 한 번 발표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개정하고 확장하는 자산으로 다루는 관행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관련 글: 「서울서체 2008: 서울한강체·서울남산체는 어떻게 도시의 글자가 됐나」, 「무료 배포가 만든 생태계: 나눔글꼴과 배달의민족 한나체」
자주 묻는 질문
현대카드 유앤아이는 정말 국내 최초의 기업 전용서체인가요?
"국내 최초"는 현대카드 관계자의 표현이며, 한경 매거진과 주간경향 등 언론도 2003년 유앤아이를 국내 최초의 기업 전용 서체로 적습니다. 다만 이는 독립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라기보다 널리 받아들여진 통설에 가깝고, 데일리안과 메트로신문처럼 도입 연도를 2004년으로 쓴 기사도 있습니다.
아리따 글꼴은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나요?
아모레퍼시픽은 아리따를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는 나눔 글꼴로 배포하며, 아리따 부리 공개 때는 글꼴 활용법을 담은 타이포그라피 매뉴얼도 함께 제공했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확인한 자료에는 상업적 이용이나 로고 사용 같은 세부 조건이 나와 있지 않으므로, 쓰기 전에 아모레퍼시픽이 안내하는 이용 약관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유앤아이와 아리따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요?
유앤아이는 현대카드가 독점적으로 써서 글꼴만으로 회사를 알아보게 하는 식별용 서체이고, 아리따는 처음부터 일반에 무료로 나눠 주는 공개형 서체입니다. 전자는 2021년 국내 기업 최초 가변서체로 이어졌고, 후자는 돋움·부리·산스·흑체로 가족을 넓혔습니다.
참고 자료
- 「현대카드 디자인의 저력, 전용 서체 '유앤아이' 20년사 담은 아카이빙북 펴내」, 한경 매거진, 2024-08-28.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2408281727b
- 「현대카드 '아워 타임페이스' 발간···서체 '유앤아이'의 변화 기록」, 주간경향, 2024-08-28. https://weekly.khan.co.kr/article/202408281049001
- 「Our Typeface: 현대카드 서체 유앤아이의 20년 역사」, 디자인컴퍼스, 2024-08-27. https://designcompass.org/2024/08/27/our-typeface/
- 「현대카드 〈Our Typeface〉」, 월간 디자인(design.co.kr), 2024. https://design.co.kr/article/33938/
- 현대카드 유앤아이 서체 보도(이름의 뜻, 1.6:1 비율, 8년 보완, 2012년 본문용 완성), 메트로신문, 2015-10-11. https://www.metroseoul.co.kr/article/2015101100015
- 「카드 안에 세종대왕있다…카드사 "한글마케팅이라오"」, 데일리안, 2014-10-09. https://m.dailian.co.kr/news/view/462517
- 「아모레퍼시픽, 한글날 맞아 '아리따' 무료 배포」, 이투데이, 2006-09-27. https://www.etoday.co.kr/news/view/100357
- 「아리따 부리 무료 배포」, 아모레퍼시픽그룹 뉴스, 2015-01-20. https://www.apgroup.com/int/ko/news/news-2015-01-20.html
- 「아리따 글꼴」 소개 페이지, 아모레퍼시픽그룹. https://www.apgroup.com/int/ko/about-us/visual-identity/arita-typeface.html
- 「폰트로 기업브랜딩 시대를 연 현대카드, 유앤아이뉴 가변서체 출시」, 디아이투데이, 2021-12-15. https://ditoday.com/?p=55936